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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록적 포퓰리즘(웬디 브라운) 번역 - 유럽정치

인무브에 실린 번역 원고로(링크), 트럼프 지지층의 사고와 이들이 신자유주의적 질서와 맺는 관계를 다룬 글. 원문 출처는 링크.

묵시록적 포퓰리즘

웬디 브라운 지음
고태경(정치학-매체학 연구자) 옮김

트럼프 체제의 혼란과 참사, 공포와 부조리에 대해서는 별도로 하고 일단 다음과 같이 묻고자 한다. 트럼프 체제는 어떻게 민중적 기반으로부터 탄생했는가, 이들이 트럼프 체제로부터 거의 얻을 게 없음에도 말이다.

많은 이들이 주목하듯, 모든 트럼프 투표자들이 트럼프가 말한 모든 것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으며 현재도 그러한바, 이는 클린턴 투표자들이 (예컨대 이 지점에서는) 그녀의 기업형 정실주의, 신자유주의, 군사주의 그리고 정치적 기회주의에 동의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일부 트럼프 투표자들은 의료비용과 직업 상실에, 그리고 공동체 및 생계표준의 몰락에 천착했다. 일부는 이스라엘에 대한 열광적이고 무한한 지지자들이었다. 일부는 세계화와 기후변화의 도전 이전 시대를 갈망했고, 그들은 명령을 통해 그 둘을 모두 물리치겠다는 트럼프의 약속에 사로잡혔다.

일부는 트럼프 대통령이 사업주로서, 투자자 혹은 노동자로서의 자신들의 전망을 더 밝게 해주리라 희망했다. 감세는 지난 30여 년간 보수주의 아젠다의 최상층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선거기간 중 트럼프는 이슬람국가(ISIS)를 폭파하는 것보다, 혹은 [국경에] 장벽을 세우거나 무슬림을 추방하는 것보다 감세에 대해 더 자주 언급했다. 일부 복음주의자들과 가톨릭 교도들은 오직 낙태 때문에 트럼프에 투표했는데, 이들은 그 외의 다른 것들에 대해서는 트럼프에 반대하는 이들이었다.

일부는 그들이 항상 그래왔듯 공화당 후보에게 투표했다. 일부는 주로 힐러리에 대한 거부감에 이끌렸고, 그 과정에서 우익 온라인사이트와 블로거들에 의해 그 거부감이 강화되는 것을 경험했다. 일부 백인 민족주의자들(nationalists) ­ 큐 클럭스 클랜(Klan)과 나치 ­ 은 50여 년 만에 처음 투표했는데, 이는 트럼프가 그들이 원하는 인사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1968년의 조지 월러스 이후 어떠한 그럴듯한 후보보다 그들에게 더 많은 미끼를 던져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부는 이미 정치적으로 공포에 가득찬 채 트럼프의 공포-선동에 동원되었다.

힐러리 클린턴과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역사상 가장 비호감의 대선 후보 둘에 속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심지어 투표소로 향한 유권자의 50퍼센트가 마지못해 투표권을 행사했다.

이 모든 것은 말하고 있다. 트럼프에게 투표한 이들은 누구인가?

묵시록적 포퓰리스트 혹은 몰락한 백인 남성다움

트럼프의 지지자 중 88%가 백인이었다. 이는 학사 미취득 백인 유권자의 2/3를, 백인 여성 유권자의 과반을, 백인 남성 유권자의 2/3를, 50세 이상의 백인 유권자의 3/4을 포함한다. 트럼프는 다수가 기대했던 것보다 라티노와 부유층, 그리고 대학교육 이수자의 표를 받았다. 하지만 그의 대중적 지지층은 노동하는 중하층 계급, 즉 35세 이상의 교육받지 못한 백인, 특히 백인 남성 노동자들이었다. 이것은 60% 이상이 백인인 나라에서 일어났다. 더욱이 출구조사에서 트럼프 투표자 중 거의 25%가 트럼프와 클린턴이 대통령으로서의 자질이 없다고 밝혔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 숫자들이 암시하는 바는 우리가 주로 정치적으로 자포자기 상태의 노동-중하층 계급을 다룬다는 것이기보다, 오히려 ‘권좌에서 폐위당한’ 백인들을, 특히 지난 네 가지의 역사적 발전 맥락들에서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주류의 위치를 상실한 이들을 다룬다는 것을 말한다.

첫 번째는 신자유주의 정책과 그 실행의 40여 년으로, 이로 인해 임금, 제반 편익, 연금, 고용안정, 공공 기반시설과 노동-중하층 계급의 고등교육으로의 접근 편이성 ­ 따라서 거의 모든 사회적 이동성 ­ 이 손상됐다.

두 번째는 30여 년의 금융화, 즉 경제적 원동력의 금융시장으로의 전환으로, 이것이 재분배를 부의 상층부에서부터 악화시켰다. 이것은 트럼프 지지층에서 ­ 특히 주택 압류와 저축 해지 등을 통해 ­ 그 피해자들을 양산한 부동산 기반의 금융위기를 낳았다.

세 번째는 세계화로, 이는 지구 북반구의 경제와 주민들로부터 거대한 규모의 산업과 백인다움(whiteness)을 박탈해 갔다.

네 번쨰는, 트럼프 투표자들에 의해 리버럴의 정치적 궤적으로 간주된 것인바, 이것은 트럼프 투표자들을 강등시키고, 역사적으로 배제되었던 집단들, 예컨대 여성, 인종적-성적 소수자들, 장애인, 신규 이민자 및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을 승격시켰다.

트럼프 지지층의 2/3가 흑인들은 그들이 누릴 만한 것 이상을 누리는 데 반해 백인들은 그들이 누릴 만한 것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상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1970년대 이후 도시와 시골 그 어디에 거주하는 이들을 막론하고 백인들보다 훨씬 거대한 몰락을 경험했다. 실업, 불완전고용과 주거비용의 상승, 노동조합 활동의 위축, 축소된 공공 서비스 및 교육기금, 급등하는 감금률 등, 이 모든 것들이 결합해 백인들의 사례보다 훨씬 더 생계표준을 낮추고 흑인 이웃들의 삶을 황폐화했다. 그러나 이러한 몰락과 황폐화는 약속이 파기되었음을 말한다. 그것은 자격(entitlement, 권한)과 주류적 위치의 상실에 대한 격정적인 원한의 재료가 되지는 않았다.

자, 트럼프에게 투표한 이 백인들은 모두 자신들의 박탈감 혹은 민족감정 때문에 소수자와 이민자들을 비난했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 니체의 르쌍띠망(ressentiment, 원한)과 프로이트의 나르시시즘적 상처에 대한 논의들을 차용하여 말하면, 오히려 트럼프의 선거캠페인이야말로 명백히 그러한 치환을 가능케 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굴욕 혹은 고통을 치환시키기 위해 어떤 대상을, 혹은 그 어떤 대상이라도 발견하고자 한다. 그러나 심지어 여기에서도, 우리는 백인 트럼프 지지층의 이질적인 특성을 고려해야 한다. 나는 그것이 우리가 좌파의 전략과 현재의 대안에 대해 숙고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하는 적어도 세 개의 긴장 혹은 에너지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 긴장은 보호, 안정 그리고 질서의 갈망이다. 그것은 불안과 공포에 의해 동기부여되며, 스트롱맨, 장벽의 건설자, 결정자 그리고 법집행자에 응답한다. 이들은 특히 중년의 백인 교외 거주자들이다. 이들은 회복가능할지도 모른다.

두 번째 긴장은 분열과 복수를 갈망한다. 이들이 앞으로 논할 묵시록적 포퓰리스트들이다. 이들은 공포보다는 굴욕과 분노에 의해 더 자극받는다. 이들은 상스러움, 허세, 거들먹거림, 그리고 ­ 신중함이 아니라 ­ 폭력의 의지에 반응한다. 이들은 건달이자 트롤이며 선동가다. 그리고 이들이 가장 오래 걸릴 것이다.

세 번째 긴장은 어떤 조정을 갈망한다. 그것은 사회경제적 좌절에 의해 동기부여되었으며, 감세와 보호주의와 고용 회복의 약속에 반응한다. 이들은 고전적 공화당원과 부동층이다.

이 세 긴장 혹은 에너지들은 악마화된 이민자들의 위협 위로 수렴된다. 이 셋은 모두 ‘세계화’와 이국성(foreignness)을 거부하며, 따라서 ‘아메리카 퍼스트’의 감성에 의해 동원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트럼프의 여러 국면들에 비-수렴점들이, 투사점들(investment)이 또한 존재한다. 어떤 이들은 질서와 보호를 원한다. 어떤 이들은 보복과 백인 민족을 원하며, 어떤 이들은 복구된 미래를 원한다.

그러나 만약 이들이 모두 금권정치적, 권위주의적, 인종주의적 체제의 격정적 지지자가 아니었다면 그러한 수렴이 가능했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담론에 빠져들어서인가, 우익 뉴스와 소셜미디어에, 하나의 주요한 테러공격에 의해, 리버럴과 좌파의 조롱에 의해, 정치적 자유의 충동적인 유혹과 신자유주의가 추동한 반-민주주의적 영토에 의해서인가? 혹은 이들은 어떤 다른 미래를 지향하며 동원될 수 있었던 것일까? 우리는 그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 혹은 이들을 인구학적으로나 전략적으로 압도할 수 있기를 단지 희망할 수 있을 뿐인가? 이에 답하기 전에 먼저 이 세 가지 에너지 각각에 대해 더 이야기해 보도록 하자.

‘불안에 빠진 권위주의자’에 대한 논의부터 시작하자. 권위주의적 지배로 이끌리는 이들에 대한 최근의 사회과학적 연구들이 일부 존재한다. 이 연구들은 그들, 즉 트럼프에게 투표한 이들 100%가 다른 유권자들에 비해 더 깊은 공포를 느끼고 있음을 알려 준다. 그들은 혼란과 변화에 대해, 예컨대 페미니즘과 남성동성애 결혼, 다문화주의, 나아가 테크놀로지와 금융, 세계화 혹은 이슬람국가에 대해 특히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세계를 혼란스럽고 위험한 것으로 묘사하는 것에 반응한다. 마약이라는 유령, 범죄와 테러, 그리고 심지어는 가정의 문턱을, 이웃을, 민족을, 인종을 혹은 영혼을 위협하는 급진적인 변화에 반응한다. 그들은 법과 질서를 원하지만 또한 힘과 결정력, 그리고 트럼프가 선거기간에 선동한 권력활용의 의지를 소망한다.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그들은 위계와 권력행사로 획득된 보호와 안정성을 소중히 여기며, 민주주의적 절차 혹은 제도를 높게 평가하지 않는다.

이제, 이러한 류의 사회과학 연구를 수행할 때 비판이론에 있어서 핵심 물음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이른바 ‘권위주의적 인격들’은 선천적인 것인가? 그것은 지도자 혹은 어떤 위협에 의해 활성화되기를 단지 기다리고 있을 뿐인가? 이것은 다음의 사실에 의해 논박되었다. 트럼프 훨씬 이전인 2011년에 비-학사졸업자의 44퍼센트가, 그러나 학사졸업자는 28퍼센트가 의회나 선거에 구속될 필요가 없는 ‘강력한 지도자’를 원한다고 인정했다. 여러분은 낙태와 동성애에 대해서도 동일한 분열을 발견할 것이다. 대학교육은 문자 그대로 이러한 [낙태와 동성애라는] 행위가 전통적 질서와 가치를 전복한다며 거부하는 이들의 숫자를 반으로 줄였다. 혹은 문제를 다르게 접근해 보자. 군부가 통치하는 것이 좋은 아이디어일 거라고 생각하는 미국인의 수는 지난 20년 전에 비해 두 배가 되었다. 20년 전에는 6퍼센트가, 지금은 12퍼센트가 이에 동의한다.

따라서 권위주의의 추종자들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더욱이 사회과학조차도 ‘비권위주의자들이 공포에 빠져 권위주의적 관점으로 전화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 트럼프의 영리함은 공포의 선동에 있으며, 그것은 장벽으로 보호된 안전과 혼란 및 위험의 추방에 대한 욕망, 즉 트럼프가 자신의 비타협적 성격과 정치로 만족감을 주는 그러한 욕망을 완성시켜 줄 것이다. 이것이 그가 선거기간 동안 ‘어둠의 이미지’(dark picture)를 유지했던 이유다. 그 대학살, 침략, 그리고 재앙[의 이미지들]은 수많은 전문가들이 과잉된 전술로 간주했던 것들이기도 하다.

두 번째 긴장, 즉 묵시록적 포퓰리스트란 무엇인가? 원한에 차 있고 굴욕을 느끼는 이들, 사회적으로 거세되고 격노한 이들에게 공포와 위험은 [정치적] 촉매제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백인 남성 자격의 회복을, 혹은 그 자격의 정치적 긍정을 원한다. 비록 그것이 실질적으로는 회복 불가능하더라도, 그것이 세계가 지옥으로 향하는 순간 그들이 행하는, 그리고 그들이 거기서 취하는 전부일지라도 말이다.

이 긴장에 있어서,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표현이 ‘미국을 다시 백인 남성의 것으로’라는 표현으로 노골적으로 전유됨과 함께, 그리고 여성 혹은 인종 비하, 외국인혐오, 약자 비방, ‘빈곤한 교양’의 긍정, 코즈모폴리턴과 도시 엘리트에 대한 공격을 통해, 트럼프는 사회적-경제적 거세를 백인 남성 자격에 대한 억제되지 않는 장악으로 전환시켰다. 

트럼프는 이 집단의 훼손된 잠재성과 그 장소를 위한 강장제다. 그는 자신의 백인다움과 부의 권력에 대해, 페니스의 난폭한 권리에 대해 어떠한 개선의 여지도 갖지 않으며 미안함을 느끼지도 않는다. 

억만장자 중 한 명이라는 점을 제외하더라도, 그는 그 엄포와 상스러움을, 그 충동적이고 독선적이며 무지하면서 모욕적인 스타일을, 그리고 사실관계와 증거, 심지어는 일관성에 대한 무관심을 갖는 존재다. 이러한 특성들이 그의 대통령으로서의 자질 결핍을 만들어 내지만, 또한 그를 평범한 남자로 만들기도 한다. 이 특성들은 트럼프의 호소에 있어서 부적합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결정적인 것이다.

백인 남성다움의 권리를 욕망하는 신자유주의자

그의 스타일은 또한 다차원적이면서도 강력한 정치적-인격적 메타포를, 미국의 힘을 과시하겠다는 약속을 생산했다. 핵위협, 나토를 공격하기, 멕시코와 중국을 굴복시키기, 이슬람국가의 폭파, 그에 불화하는 모든 이들에게 모욕을 주는 것, 페미니즘, 다문화주의, 이슬람, 지식인과 정책통을 매도하기 등. 대통령이라는 지위에 있어서 그러한 행위의 위험은 그 행위가 의미하는 잠재력의 복원과 강화에는 부적절하다. 그리고 다시 이것이 대통령으로서의 그의 특징적인 자격 결핍이 그의 대통령 당선에는 이롭게 작용했던 이유다.

요컨대, 트럼프는 정치적으로나 인격적으로 그 자격이 괴롭히는 자(bully)와 폭격수임을 재확인했다. 왜냐하면 ­ 그 외에 아무런 함의도 갖지 않더라도 ­ 괴롭힘과 폭격이야말로 백인 남성다움의 권리이기 때문이다. 미국 내 어떠한 다른 인간 형상 ­ 여성, 황인, 흑인, 퀴어 ­ 도 이러한 방식으로 말하거나 행동할 수 없을 것이다. 특히 범죄가 되거나 투옥되는 걸 감수하지 않는 한, 직접적인 자기파괴 없이는 정치적으로 그러할 수 없다.

그러나 트럼프의 무례하고 공격적이며 무지하고 모욕적인 말과 행동은 백인들에게서 그 자격을 복원하며, 이는 다시 백인 우월성의 복원으로 귀결된다. 나아가 호전적인 백인 남성다움과 호전적인 미국다움을 다시 정당화할 때, 트럼프는 그 둘을 재화합시키는 것이며, 다음과 같은 고전적 포퓰리즘의 슬로건을 제시하는 것이다. “당신만이 진정한 미국인입니다. 당신이 미국의 본질인 것을 잊지 마십시오.”

다시 말해, 트럼프의 억제되지 않는 충동과 무지가 어떻게 질서와 보호의 약속을 가져올 수 있는지에 당황해 하는 리버럴은, 굴레로부터 탈피한 트럼프 자신의 자격이 어떻게 21세기의 거세된 백인 남성다움의 상처에 성유(聖油)를 바르는 것인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힐러리 클린턴이 표현하는 도발을 놓치고 있다. 달변의, 스마트하고, 지적이며, 엄격하고, 전통적 페미니스트라면 열광하며, 권력과 지식과 인맥의 세계에 존재하는 그녀는 이 집단에게는 자신들을 [권좌로부터] 폐위하고 거세한 그 모든 것이었으며, 지금도 그러하다. 그리고 이것이 그들이 그녀를 혐오하는 이유다.

그러므로 권위주의자들[첫 번째 에너지]에게는 공포와 위험이 존재한다. 원한에 찬 앵그리 화이트 녀석들[두 번째 에너지]에게는 괴롭힘, 공격성 그리고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함이 존재하며, 나아가 세 번째 에너지에는 ‘대학살과 몰락’이, ‘훼손된 직업 및 파손된 도시와 마을’이 존재한다. 그것은 경제적 쇠퇴와 몰락에 좌절하는 폐위당한 백인다움으로부터 출현한 것이다. 물론 클린턴은 첫 번째 에너지는 무시하고, 두 번째에 대해서는 반발하며, 세 번째는 다음과 같은 그녀 고유의 메시지를 통해 소외시킨다. “미국은 이미 위대합니다. 우리는 그 여정을 계속할 필요가 있습니다. 해야 할 많은 것들이 있죠. … 진보, 진보, 진보.” 이 메시지는 전문직업군과 청년을 노린 것이지만, 또한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최근에 유권자 자격을 얻은 이들, 예컨대 인종적-성적 소수자, 장애인, 노년 여성, 신규 이민자들을 노린 것이기도 하다. 그사이에, 현실적인 그리고 감각적으로 느껴지는 쇠퇴가 내륙의 중년과 노년 백인 노동중하층 계급의 경험을 틀지었다. 그녀의 메시지는 자신들이 폐위당하고 있으며, 새로운 집단과 직업들 ­ 코즈모폴리턴들, 다문화주의자들, 과학기술, 금융, 힙스터, 랩퍼, 슬랜더그린(slender green) 주스기 그리고 전 지구적 통치자들 ­ 에 의해 무시당하고 있다는 그들의 느낌을 간과한 것이다. 

자, 따라서 우리는 테러, 범죄, 이민자들에, 소실되는 인종적-젠더적 지위와, 그 지위와 함께 ­ 우익 미디어와 당대의 잘못된 민주당 후보에 의해 선동된 ­ 경제적 번영의 약속이 소실되는 것에 기겁한 나이 먹은 백인 미국인들로 인해, 불안정하고 위험하며 복수에 찬 무학자가 지구상의 가장 강력한 위치에 서게 되었음을 본다.

하지만 이것이 왜 그리고 어떻게 반-민주주의적 권위주의의 형태를 취하고, 금권정치, 즉 부자들에 의한 그리고 부자들을 위한 통치의 부활을 가능케 하는가? 특히 그 권위주의와 금권정치가 이 에너지들 모두를 동원하거나 동기부여하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신자유주의로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 정책(자유무역, 역진세, 탈규제, 고삐 풀린 자본, 노동유연화, 복지국가의 축소, 공공재의 사유화)이자 합리성의 한 형태로서의 신자유주의로 눈을 돌려 보자. 후자[합리성의 형태]와 함께 모든 인간활동은 시장의 논리에 온전히 종속되는 것으로 나타나며, 가치와 행동에 있어서 경제적으로 측정된다. 인간존재 그 자체는 자기 삶에 책임을 갖는 기업가가 되거나 자기투자형 인적 자본이 된다. 정치적, 인격적 그리고 사회적 관계는 신자유주의 이성에 의해 시장 논리 속에서 번역되며, 배움에서부터 먹는 것까지 모든 것은 투기적 투자의 문제가 된다. 그것은 여러분의 포트폴리오에서 분류되고 평가되며 조정될 것이다. 그리고 민주주의 그 자체는 평가절하되고 변형된다.

신자유주의 정책과 합리성은, 즉 전 지구적 경제질서와 새로운 이성의 질서는 어떤 방식으로 현행의 체제를 생산 혹은 야기하는가?
물론, 형식적으로는 최근의 선거들, 예컨대 브렉시트와 같은 국민투표는 전 지구적 자유무역과 자본 및 노동의 자유이동에 대한 거절을 표현했다. 많은 전문가들이 브렉시트와 미국 대선 이후에 신자유주의에 죽음을 선포했다. 그러나 자유화, 탈규제, 감세, 복지 축소 등의 신자유주의 정책은 트럼프 체제에서 더욱 강화되었다. 더욱이 트럼프의 부상은 ­ 보호주의에서 권위주의까지, 외국인혐오에서 나토에 대한 공격까지, 영구적인 선동에서 정치의 거래로의 환원까지 ­ 신자유주의의 효과에 다름 아니다.

이 점에서 가장 명료한 것은 임금, 고용안전, 은퇴대책, 교육의 질 등의 하락이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에 의해 발생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세계화가 존재한다. 여기서 나는 트럼프가 막 부상하기 전에, 아직 미완의 상태로나마, 수많은 폐위당한 미국 백인들이 미국 경제권력의 쇠퇴와 백인권력의 쇠퇴, 그리고 남성 소득의 쇠퇴와 국민국가 주권, 즉 국가의 운명에 대한 통제력의 쇠퇴를 엮는 연결고리를 상상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옳았다. 연안의 제조업 일자리와 주택공급의 감소로부터, 전례 없는 이민의 물결, 금융과 자본, 안정적인 백인노동중하층계급의 남성생계부양자, 국민국가의 주권 그리고 미국의 경제적 우월성까지 그 모든 것이 끝났다. 이 상황은 역전될 수 없지만, 반대로 정치적으로 도구화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가 이민자의 존재가 그렇게 중요해지는 지점이다. 아랍 무슬림이 밀입국 과테말라인 혹은 멕시코인과 뒤섞이는 지점이며, 미국 남부 국경의 장벽이 여행금지령과 겹치는 지점이고, 좋은 직업에 대한 거짓된 약속이 범죄 및 테러로부터의 보호에 대한 거짓된 약속과 뒤섞이는 지점이다. 여기가 국경과 장벽이 침식하는 곳이고, 경제권력과 안전이 인종화된 인과논리에 엮이며 경제적 보상에 엮이는 곳이다. 좋은 거래가 나쁜 거래를 대체할 것이다. 그리고 여기가 백인에 대한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의 함축적 약속이 모든 정의지향적, 모든 생태적 지속가능성의 고려들을 굴욕적이고 나라를 팔아먹는 것으로 매도하는 지점이다. 마치 앵그리 화이트가 굴욕을 당하고 팔아치워져 버렸다는 듯이.

요컨대 그 정책적 전환이 국제자유무역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었다면, 그 근거와 프레임 그리고 효과는 여전히 신자유주의적인 것이다. 잠시 이 문제에 더 깊게 천착해 보자.

모든 행위와 영역들을 경제 프레임에 투사하면서, 즉 시장과 시장의 행위를 모든 인간과 조직에 고유한 것으로 간주하면서 신자유주의적 이성은 정치에 대한, 심지어는 민주주의적 권력 공유(투표는 제외)에 대한 특유의 반감을 수반한다. 이는 정치와 민주주의를 잘해 봐야 시장을 황폐화하는 것으로, 최악의 경우는 전제적인 사회정의의 강령과 전체주의로 귀결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것은 정치와 민주주의의 장소에 비지니스의 원리와 시장의 지지에 기반한 국가주의 형태를 소환하고자 한다.

여기서 문제는 신자유주의적 합리성 내에서 시장의 정의가 사회적-정치적 정의를 대체하고, 따라서 더 거대한 불평등과 배제를 정당화한다는 류의 익숙한 무엇이 아니다. 이러한 주장은 분명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주목하는 것은 신자유주의적 이성 안에서는 정치가 자유, 질서 그리고 진보의 적(敵)으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것이 일정 정도는 필연적이지만, 그러나 사회적 정의 혹은 사회적 계획의 목적을 위해 그러한 것은 아니다. 여기가 강제력(coercion)이 자유에 대립하고, 혁신, 자생적 질서, 진보 그리고 개인책임성을 생산하는 자유의 역량을 감축시키는 것으로 오용되는 지점이다.

기껏해야 왜곡과 방해로, 최악의 경우에는 전체주의로 귀결되는 정치와 민주주의 정책에 대한 이러한 도전은 신자유주의 문화에 깊게 침윤해 있다. 그것은 반-민주주의적 포퓰리즘의 반란을 조장하며 이를 통해 자유와 권위주의를 동시적으로 소환한다. 비지니스 원리의 필요에 따라 보호하고 배제하며, 안전을 보장하는 국가주의적 권위에 의해 유지되는 시장유형의 자유를 말이다.

비지니스의 원리와 그 실행은 무슬림 추방과 무제한적인 억류로부터 환경 및 경제정책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것을 결정하는 데 있어 입헌주의 혹은 여타의 민주주의적 제도들의 경계를 ­ 대체하지는 않더라도 ­ 규정할 것이다. 따라서 트럼프는 자신의 행정명령에 대한 법적 견제를, 무지한 내각 인선에 대한 의회의 저항을, 그리고 의회의 심문과 그에 대항한 주류 미디어와 대중의 일상적 저항을 ‘정치라고’(as politics) 비난한다.

마찬가지로, 거래와 행정적 강권이 민주주의적 절차와 원리를 대체할 것이다. 전임자들에 대한 트럼프의 특징묘사는 다음과 같다. 전임자들은 중국, 러시아, 유럽연합, 나토, [자동차 기업] 피아트, 포드, 에너지 산업 등과 관련해 ‘나쁜 거래’를 했고, 그는 그것을 좋은 거래로 대체할 것이다. 그리고 한 명의 좋은 CEO처럼 그는 지지자들에게 보상하고 비방자 혹은 경쟁자를 처벌할 것이다. 이들이 도시이든 국가든, 집단이든 개인이든, 민족이든 국제조직이든 개의치 않는다.

트럼프 본인이 말한바, ‘뿌리를 뽑겠다’(drain the swamp)라는 그 유명한 약속은 정치로부터 월스트리트 혹은 부를 뽑아낸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정치로부터 정치와 정치가를 뽑아버리겠다는 약속이었다. 여기서 그는 정치 ­ 민주주의적 제도와 요구들을 포함해 ­ 는 비지니스 행위에 개입하는 것이며 경쟁의 이점을 보존하는 데 목적을 둔다는 신자유주의적 상식에 준거하고 있다.
만약 정치에 대한 이러한 규탄이 신자유주의의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의 중요한 한 줄기라면, 마찬가지로 내가 ­ 민주주의적 가치, 제도, 기대 그리고 인식을 포함해 ­ 신자유주의의 만물의 경제화라고 부른 것은 금권정치적 권위주의의 지지기반을 창출하는 중요한 흐름이 될 것이다.

민주주의의 의미와 실천은 시장의 의미론에 종속될 수 없다면 생존할 수 없을 것이다. 자유는 시장의 진전으로, 가진 것의 보존으로, 따라서 점증하는 불평등과 그 모든 사회적 효과에 대한 무관심을 정당화하는 것으로 환원된다. 배제는 경쟁을 강화한다는 점에서 정당하며, 투명성이나 책임보다는 비밀이 좋은 비지니스적 감각이 된다. 인민주권은 문자 그대로 부조리하며 ­ 시장에는 인민주권을 위한 자리가 없다 ­ 따라서 시민권은 투표를 하는 것으로 환원되는바, 우리의 대법원은 민주주의에 대해 말할 때 이 장소를 흔히 ‘정치의 장터’라고 부른다.

오늘날 이 장터에서 투표자들은 소비자가 다루어지듯 분석되고 세분화되고 표적이 되며, 조작되고 눈속임을 당한다. 그들은 교육받은 이들이 아니며, 사고하고 숙고하며 참여하거나 권력을 공유하도록 요청받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통치를 요청받지 않는다.
물론 신자유주의는 또한 공공재를 사유화하고 공통적인 것에 관련한 개념을 부조리한 것으로 만듦으로써 민주주의 문화를 약화시킨다. 그리고 그것은 사회정의의 개념을 정치적 규범의 전제적 강요라고 공격하는바, 정치적 규범에는 오직 사적 자유와 가치만이 지배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끝으로, 고등교육을 사유화함으로써 신자유주의는 고등교육에 대한 접근을 계층화하고 교육의 목적을 변형시켰다. 그것은 고등교육을 직업훈련으로 환원했고, 교육된 민주주의의 창출이 갖는 가치를 제거했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트럼프에게 권력을 안겨준 저 ‘교육적 분할’이 영원한 계급적 분할이 아니라 변별적인 신자유주의의 효과임을 상기시켜 준다.

전체적으로 정치에 대한 신자유주의의 노골적인 폄하가 존재한다. 민주주의 제도와 가치 그리고 이미지들에 대한 공격이, 공공재와 공적 삶, 사회정의와 교양시민에 대한 신자유주의의 공격은 새로운 반-민주주의적, 반-평등주의적, 자유지상주의적, 권위주의적 정치조건을 탄생시켰다. 이 조건은 이제 앞서 고찰했던 세 개의 에너지라는 연료 위에서, 즉 공포와 불안, 소실되는 사회경제적 지위와 원한에 찬 상처받은 백인다움 위에서 불타오르게 된다.

동시에, 신자유주의적 상식은 트럼프 체제가 신자유주의의 세 가지 기초와 더불어 전진하도록 한다. 그것이 기후변화, 야생보호, 노동착취, 건강과 안전, 평등권 그리고 금융의 고삐 풀린 권력에 대한 법을 목표로 할 때에는 탈규제를. 예술, 과학, 미디어, 교육, 빈민대책 그리고 보건을 위한 공적 기금에서 남겨진 것들을 처분하는 경우에는 사유화를. 비지니스와 부자를 위할 때에는 감세를 그 기초로 할 것이다.

이는 정치의 축소를 통해 자유를 강화하겠다는 세 가지의 약속이다. 그러나 다시, 이 반-정치는 반-국가가 아니다. 트럼프는 열정적으로 국가권력을 휘두르고자 한다. 다만 민주주의하에서 인민의지의 집행자로서가 아니라 나라를 기업으로 간주하는 난폭한 비지니스맨으로서 말이다. 그는 비즈니스를 무력화하는 것을 열정적으로 제거하고자 한다. 규제, 절차, 검열과 대차계정, 권력분립, 내부 저항 혹은 배신, 투명성의 요구, 독립언론 등, 이 모든 것들을 트럼프는 폄하하거나 피해가거나 배제해 버린다.
이것이 신자유주의에 의해 형성되고 활성화된 포퓰리즘적 반란이 반-민주주의적 금권정치의 권위주의에서 절정에 이르는 방식이다.

신자유주의가 낳은 프랑켄슈타인 

요컨대, 신자유주의가 생계와 지역유대를 악화시킴으로써, 민주주의를 공허하게 하고 탈-정당화함으로써, 국민주권을 침식하고 직업훈련과 비지니스형 전문지식에 무관한 인식을 가치절하함으로써 이러한 반란을 야기했다 해도, 이것이 오늘날 형성된 정치적 조건이 신자유주의 지식인 혹은 정책입안자들에 의해 의도되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반대로, 트럼프 체제에서 전개되는 민족주의(nationalism), 보호주의, 기업과 금융과 정부 권력의 혼용, 혐오집단의 동원 등, 이 모든 것들은 신자유주의자들에게는 악몽이다.

기업지배체제(corporacracy), 금권정치, 권위주의는 프라이부르크에서 빈을 거쳐 시카고에 이르기까지 [모든 학파의] 신자유주의자들이 반대하던 것들이다. 그들은 사회주의에 반대하고 신중하게 형성된 국가정책의 추진하에 놓인 시장이 자신들의 해법이라고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그것들에 반대한다. 이들은 정치당국에 자리 잡은 기업권력을, 시장을 조작하거나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권력을 한데 묶는 여타의 방식들을 두려워한다.

본래의 신자유주의자들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들을 한데 묶는 것은 경제권력으로부터 정치권력을 분리하고 후자를 전자를 위해 축소하고자 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케인스주의적 테크노크라트들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는 것만큼 지대추구형 금권정치가들에게 불편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들이 ­ 특히 하이에크와 질서자유주의자들이 ­ 또한 두려워했던 것은 정치활동이 현혹당한, 그리고 조작가능한 대중들로부터 영향을 받는 것이었다. 오늘날 트럼프와 우파 민족주의자들이 활용하고 있는 것이 이 대중의 극장이다. 그들은 이것이 경제원리에 뿌리내린 통치에 의해서도 방해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신자유주의가 인종주의적인 반-민주주의적 권위주의 포퓰리즘을 위한 지반을 닦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신자유주의의 본질적인 텔로스(telos, 목적)는 아니다. 신자유주의는 내생적으로 종족적 민족주의(ethnonationalism)나, 권위주의 혹은 금권정치체제가 아니다.

오히려 나는 그것이 신자유주의의 프랑켄슈타인이라고 말하고자 한다.

한편으로, 신자유주의는 사회경제적 좌절을, 불안정성과 불안을, 민족적 지평의 소실과 사회적 분열을 야기했고, 이것이 민족주의, 인종주의, 외국인혐오 그리고 권위주의적 지배의 욕망을 조장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신자유주의는 거대한 국가주의와 결합한 시장 정의와 시장원리를 위해 정치와 사회정의, 심지어는 민주주의에 대한 적대를 양산했다.

세 번째로, 잠시 피케티를 따라 말하면 그것은 성장을 추월하는 자본축적을 야기했고, 부의 최상층으로의 점증적 집중을 야기했다. 이것은 하늘을 찌르는 불평등 ­ 이제 이 세상의 8명은 세계의 하층부의 36억 명만큼의 부를 갖고 있다 ­을 양산했을 뿐 아니라, 또한 특히 FIRE 영역, 즉 금융(Finance), 보험(Insurance), 부동산(Real Estate)에서 지대추구를 양산한바, 그 지대추구의 거인들이 트럼프 내각에 서식하고 있다. 지대추구는 정치권력으로 하여금 그것을 할 수 있도록, 즉 금권정치를 하도록 요청하고 있다. 다시 말하건대, 그것은 본래의 신자유주의자들이 혐오하던 것들이다.

요컨대, 신자유주의는 바이마르가 그랬던 것처럼 의도치 않은 알을 낳았다.

이제 결론을 내리고자 한다. 우리는 서구의 거의 모든 민주주의 체제에서 외국인혐오형 우파 민족주의의 격렬한 폭발을 목격하고 있다. 나는 이 우파 민족주의의 특성을 조직하는 데 있어서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그 정책과 통치이성의 형태에 있어서 중요하다고 말해 왔다. 신자유주의는 경제의 수반자이자 행위자인, 그리고 동질적인 정체성의 장소인 국민국가의 쇠퇴하는 권력과 그 중요성에 대항한 반동을 야기했다. 그것은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차원에서 백인 남성 지배와 그 자격의 격렬한 쇳소리를 낳았다. 그것은 경제 엘리트나 자본주의보다는 정치적-문화적 엘리트들에 대항한 포퓰리즘적 포효를 야기했다. 그것은 점차 금융에 의해 지배되고 폭력에 의해 요동치며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통제되지 않는 세계에서의 불안과 휘발성과 테러에 대한 공포를 야기했다. 그것은 세계의 다른 곳으로부터 터를 잃은 채 피난처를 찾아 떠난 7,000만 인간존재의 전례 없는 도전을 야기했다. 그리고 이러한 반란이 반-자본주의 혹은 급진 민주주의로 전환되지 않도록 하는 정치적 야심에 찬, 그리고 경제적으로 강력한 세력들이 존재한다. 신자유주의는 이 세력들에 의한, 앞서 말한 모든 것들의 착취를 가능케 했다.

이는 우리에게 일련의 물음을 남긴다.

첫째, 인민의 지배와 민주주의 제도를 가능케 했던 것이 너덜너덜해진 지금, 선거민주주의의 외피를 보존한다는 것의 위험이란 무엇인가?

둘째, 어떻게 우리는 이 시대의 절망과 심층적이며 공언되지 않는 니힐리즘에 답할 수 있는가? 니체가 예기했듯, 지난 두 세기 동안 점증했고, 신자유주의적 이성에 의해 선동된 니힐리즘에 대해. 진리와 이성을 노리개로, 가치를 대체가능한 것으로 만들며, 현재 혹은 미래를 위한 양심 및 책임감을 강자 그리고 마찬가지로 약자에 의해 황폐화하는 니힐리즘에 대해. 그리고 임박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그리고 생태적 파국이 복잡성을 사고하고 창조하고 말하며 서식하는, 또한 폭력을 조직하고 대지를 쓰레기와 폐물로 뒤덮는 인간 고유한 능력으로부터 발원한다는 절망에 대해 말이다.

이 니힐리즘 및 절망과 더불어 무엇을 할 것인가?

세 번째 및 그와 관련하여, 우리는 어떻게 이 정치적 융기(uprising)의 묵시록적 차원에 답해야 할까? 묵시록적 포퓰리즘은 미래에 대한 고려를 결여한 채 사태를 파괴하고자 한다. 그것은 브렉시트 찬성자들에 의해 다음과 같이 표현되었다. “맞아요. 저는 브렉시트가 우리를 절벽으로 이끌 거라는 걸 알아요, 하지만 [지금] 이것은 참을 수 없어요.” 그리고 트럼프 지지자들은 말한다. “맞아요, 그는 세계를 파괴할 거에요. 하지만 저는 너무 화가 난다고요.” 혹은 “저는 그가 나라를 구할 수 없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지금은] 얼마나 지옥 같냐고요!” 니힐리즘과 절망이 여기에 작동하고 있지만, 그러나 또한 이는 미래가 ­ 미래가 존재한다면 ­ 백인 남성지배의 종언을 수반할 것이라는 무언의 인정이기도 하다. 그들의 지배가 끝날 때 그들과 함께 세계를 장악하고자 하는 이들이 항상 존재한다.

네 번째, 현행의 맥락에서 어떻게 좌파의 목표를 진전시킬 것인가? 신중한 평등주의와 자기통치, 거대한 불의와 폭력 그리고 고통으로부터의 구원, 나아가 지속가능하고 민주적인 생산 및 소비 양식의 발전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 목표들은 신자유주의적 이성에는 적합하지 않다. 그것들은 중도주의자들과 우파들, 그리고 권위주의자들과 현실주의자들에 의해 정치적 목적이라고 묵살된다. 이 목표들은 거대한 자격(entilement, 권한)이자 권력인 백인다움의 역사에 종언을 수반한다. 그리고 이것들은 실현하기가 너무나 어려우며, 지역적으로 조직화된 상황에서 여전히 너무나 취약한 전 지구적 규모에서는 이행되는 것이 불가능하다.
실제로, 인간사에서 사회적-정치적-경제적 상황의 심층적 전환이 [지금보다] 더 위태롭고 복잡하며 아득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이 지구와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의 미래를 보호하는 데 있어 더 필수적으로 보인 적은 없었다.
어떻게 기성의 상태에 안주하려는 중도주의적 의지 혹은 미래를 파괴하려는 묵시록적 충동이 다른 욕망의 질서로 규합될 수 있을까?

어떻게 신의 죽음으로부터 유발된 니힐리즘이 세계는 우리 손 안에 있다는 의식으로 전환될 수 있을까? 가치는 하늘 위에서 혹은 어떤 심층적인 기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택된다. 통치의 진실은 구성되며,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진실을 의식적으로 구축하길 요구한다. 자본주의는 국가공산주의와 마찬가지로 어쩌면 여생을 마감했는지 모르며, 금융에 의한 그 지배는 어쩌면 오늘날 인간적 필요에 대한 공급 및 생태학적 지속가능성과의 그 양립불가능성을 최종적으로 증언하고 있는지 모른다.
어떻게 우리는 정의를 회생력이 지금은 휴식을 취하는 장소로 소환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우리는 생존만이 지배하는 장소로 번영해 들어갈 수 있는가? 끝으로 어떻게 좌파가 민주주의 ­ 민주주의가 항상 실현되지 않았다는 점으로 인해 ­ 를 포기하지 않도록 설득할 수 있는가? 어떻게 우리는 민주주의의 상태를 자유와 평등과 자기통치를 결합하고자 하는 우리의 최대 희망치로 복원할 수 있는가?

카탈루냐는 유로존 헤게모니 위기의 두번째 시험대다 내가 쓴 글 - 국제

프레시안에 기고한 칼럼이다(링크).

카탈루냐는 유로존의 벽을 넘어설 수 있는가

고태경 정치학·매체학 연구자

오늘날 카탈루냐의 운동은 분리주의 운동인가, 독립운동인가? 이 운동이 19~20세기 식민지 해방운동과는 궤를 달리함은 분명하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쟁점은 투쟁의 상대가 누구인가 하는 점에 있다.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투쟁 상대는 스페인 중앙정부다. 지난 10월 1일자 독립 총투표의 직접적 기폭제가 된 것은 2010년 스페인 헌법재판소의 카탈루냐 자치법령에 대한 위헌 판결이었다. 2006년 카탈루냐 주가 포고한 자치법령은 카탈루냐를 행정적 자치단위를 넘어 독자적인 '민족'(nación)으로 규정했고, 헌법재판소는 이러한 자치정부의 자기규정을 스페인 전체의 통합성을 저해하는 위헌적 요소로 간주했다. 스페인 소속의 주이면서도 민족 고유어인 카탈루냐어를 사용하고, 독자적인 민족적 유대감을 발전시켜 온 카탈루냐인들에게 이 위헌판결이 거대한 분노를 촉발시켰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헌법재판소의 위헌판결 이후로 카탈루냐 내 독립여론은 20% 내외의 낮은 수준에서 과반을 웃도는 수준으로 큰 반전을 겪게 된다. 같은 해 남유럽 전역에서 폭발한 재정위기는 민족문제와 시너지를 일으키며 카탈루냐 독립 투쟁의 외연을 대중운동의 형태로 확대했다. 오늘날 카탈루냐의 분리-독립운동에서 스페인 중앙정부의 노골적인 탄압은 이 장기적인 위기의 한 단면만을 보여줄 뿐이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분리-독립 후의 유로존과의 관계설정에 있다. 중앙정부와의 분리가 자연스럽게 '유로존 탈퇴'의 상황을 연출했을 때, 카탈루냐는 정말 신자유주의 헤게모니 블록으로부터 '독립'적인 정치공동체로 생존할 수 있을까. 카탈루냐 독립투쟁은 중앙정부뿐 아니라 1978년의 민주화와 함께 시작된 신자유주의 헤게모니와의 대결을 동시에 예비하고 있다. 

스페인 '1978년 체제'의 위기와 카탈루냐의 신흥 좌파 

포데모스의 이론가 마뇰로 모네레오는 현행 스페인 내 정치적 쟁점을 '사회적 문제'와 '민족적 문제'로 양분한 바 있다. 사회적 문제란, 유럽 재정위기를 통해 전면화된 계급문제를 지칭하는 반면, 민족 문제는 카탈루냐와 바스크 등 자치주들의 자율성 확보을 위한 스페인 내 분리-독립 운동들을 지칭한다. 프랑코 독재기인 1970년대 이전까지 카탈루냐의 민족주의 운동은 지역 노동계급에 기반한 좌파 민족주의적 경향을 수반했다. 반면, 독재자 프랑코의 죽음 이후 수반된 가파른 '민주화'의 물결은 '1978년 체제'라 불리는 새로운 헌정 체제를 양산하며 정치적 자유화를 야기했다. 1978년 체제하에서 카탈루냐 민족운동은 엄밀한 의미의 직접적 독립운동의 성격을 띠지는 않았다. 대체로 스페인 중앙정부와의 관계도 개선된 상태였기에, 정치세력들 역시 직접적 독립이 아니라 연방제로의 이행을 통해 자치주로서의 상대적 자율성을 인정받고자 하는 경향이 강했다. 

반면 2010년 헌법재판소의 위헌판결과 유럽 재정위기가 겹치며 소극적인 민족운동은 직접적인 주권적 독립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다. 스페인의 '1978년 체제'는 정치적 민주화와 함께 자산 시장의 거대한 거품을 수반했다. 1980년대 이후 부동산-금융 시장은 초국적 자본을 스페인으로 불러들이기 위해 비정상적으로 비대해졌고, 2000년대 들어 서민대출을 통해 중하층 노동계급에게까지 침투하여 글로벌 금융위기와 함께 아래로부터의 연쇄 파산의 움직임을 만들어 냈다.  

2010년 유럽재정위기는 이러한 맥락에서 신자유주의 금융화를 불러온 1978년 체제의 총체적 위기로 평가된다. 익히 알려진 대로, '분노한 자들'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2011년의 거대한 거리 시위는 신흥 정당 포데모스를 비롯해 공산주의 계열의 새로운 좌파 조직들의 결성으로 귀결되었다. 카탈루냐 내에서의 흐름은 보다 역동적이었다. 부동산 시장의 붕괴로 민중들의 주거권 불안이 현실화되자 먼저 지역 주거권과 도시 자치의 문제가 핵심적인 의제로 떠올랐다. 부동산-금융 시장의 횡포에 맞서 '주택담보대출에 공격당한 이들을 위한 플랫폼'(PHA)이라는 주거권 운동조직이 결성되었고, 이 조직을 이끈 아다 콜라우가 지역 좌파정당 '바르셀로나 엔 꼬무'(Barcelona en Comú, 이하 '엔 꼬무')와 포데모스 등의 선거동맹하에 바르셀로나의 시장으로 당선된다.

2011년 '분노한 자들' 시위의 핵심적 성과 중 하나는 거리의 대규모 투쟁이 이후 소멸하는 과정에서 지역 거점형 운동조직과 신흥 좌파정당의 결성으로 이어졌다는 점이었다. '도시 자치'와 '생태' 등의 화두가 2010년대 스페인 사회운동의 주요의제로 부상했다. 바르셀로나의 주거권운동에 기반해 성장한 '엔 꼬무'는 무엇보다 에너지 전환, 공공보건, 주거권, 노동권 등의 의제들을 공론화하며 '도시' 기반의 대안적 거점 공동체 운동을 진행했다. 맑스주의 공간이론가 데이비드 하비에게 영감을 받은 이들은 도시 자체를 기존의 공장을 대체하는 투쟁거점으로 간주하며 대안적 정치공동체 모델을 만들어 내고자 했다. 이에 따라 '사회적 연대경제'의 모토하에 지역의 대안 에너지 모델을 구축하고, 공공 서비스의 확대를 강력하게 이끌어 낸다.
(10월 3일 카탈루냐 총파업 참여자들의 모습으로 왼쪽은 독립을 상징하는 '에스텔라다' 기를, 
오른쪽은 독립에 '찬성'(Si)한다는 의미의 깃발을 메고 있다.)

카탈루냐 내의 친독립파 사회주의 활동가들의 약진 역시 놀라웠다. 1980년대 이후 카탈루냐 내 일부 마을과 도시에서 소규모 거점운동을 진행하던 일부 비-의회주의 활동가들이 '인민연합후보'(Candidatures d'Unitat Popular)라는 정당을 창당하며 2000년대부터 카탈루냐 내 지자체 선거에 얼굴을 드러낸다. 이들은 카탈루냐를 독자적인 국가단위로 간주하고, 카탈루냐 민족해방이 사회주의적 이행에 필수적이라고 보는 친독립파 사회주의자들이다. 2000년대까지도 정치 지형에서 주변화되었던 이들의 성장세는 2011년 '분노한 자들' 시위와 카탈루냐 독립 여론을 등에 업고 가파르게 전개되었다. 2012년 카탈루냐 총선에서 3.4% 득표로 원내진출에 성공한 이들은 2015년 카탈루냐 조기 총선에서는 8.2%를 득표하여 원내 10석을 획득한다(총 135석). 2015년 카탈루냐 총선을 앞두고 독립 이슈를 축으로 좌우파의 거대한 이합집산이 진행되는 가운데, 독립파 연립정부에 참여한 이들은 최저임금 인상, 반민중적 에너지 산업에 대한 금지법, 난민보호법 등을 제정하며 카탈루냐 주정부의 좌익적 전회를 견인하고 있다. 

재정위기 이후 형성된 이러한 자치 운동조직과 신흥 좌파의 부상은 기본적으로 중앙정부의 거버넌스 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이 거버넌스 위기는 신자유주의 긴축정책을 강제한 유럽연합의 헤게모니 위기이자 스페인 '1978년 민주화 체제'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이 범역적인 위기는 카탈루냐 정치 세력구도를 그 근본에서부터 완전히 재편성했다. 우선, 주도권을 쥔 리버럴 우파의 분열이 시작되었다. 민주화 이후 무려 28년간이나 카탈루냐 집권당이 되었던 슈퍼리치 기반의 정파연합정당 '수렴과 연합'(CiU)이 친독립파인 '민주수렴당'과 바독립파인 '민주연합당'으로 분열되었다. 양대정당인 카탈루냐 사회당 역시 당내 독립파가 탈당해 '좌파운동'(MES)이라는 정당을 결성한다. 민주수렴당과 좌파운동은 중도좌파 계열의 '공화주의 좌파' 등과 선거동맹을 맺으며 총선에서 승리한다. 여기에 사회주의 그룹 '인민연합후보'가 연정파트너로 합류하면서 카탈루냐 주정부의 좌측 견인력을 강화했다.

주정부의 수반인 카를레스 푸지데몬은 민주수렴당 출신의 우파 정치인으로, '인민연합후보'가 기존 주정부 수반이었던 아르투르 마스의 긴축정책을 문제삼으며 연정을 거부하자 타협안으로 주정부 수반에 추천된 인물이다. 민주수렴당이 자신들의 지지세력인 자본가 블록과 충돌하고, 인민연합후보의 요구를 수용하면서까지 독립투표를 강행한 데서 알 수 있듯, 카탈루냐 대중들의 독립에 대한 갈망은 매우 뜨겁다. 반면, '엔 꼬무'와 포데모스 등의 신흥좌파들의 움직임은 일정한 딜레마에 봉착해 있다. 엔 꼬무는 민족의 자결권은 옹호되어야 하지만, 독립이 아니라 연방제를 추구해야 한다는 스탠스를 취하고 있다. 포데모스의 당대표인 파블로 이글레시아스는 10월 20일자의 현지 미디어와의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카탈루냐가 스페인 내에 남아 있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권력의 강제가 아니라 국민투표를 통해서 그렇게 하기를 원합니다." 두 정당 모두 스페인 중앙정부의 월권행위를 규탄하고 있지만, 독립의 찬반을 묻는 현행의 프레임하에서 그 정치적 실효성은 매우 모호한 상태다. (포데모스의 경우) 전국정당으로서 민족적 분리를 완전히 옹호할 수 없다는 점, 나아가 유로존 탈퇴의 위험을 고려해야 한다는 복합적 고민이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좌파의 분열과 유럽연합의 헤게모니 

한편, 혼란을 틈타 먼저 유럽연합 대표자들의 발언이 이어졌다. 유럽의회는 개별 국가의 정당들이 다시 유럽의회 내에서 정당동맹의 형태로 새로운 정당체를 건설하는 특징을 갖는다. 예컨대, 독일의 기독교민주연합은 유럽의회 내에서 스페인 국민당, 프랑스 공화당 등의 다른 리버럴 우파 블럭들과 함께 유럽국민당(EPP)을 구성 중이다. 유럽의회 내 최대 정파인 유럽국민당의 원내대표 만프레드 베버가 먼저 "카탈루냐 자치정부가 이 갈등을 더 확대할 경우, 새로운 유럽위기가 또 일어날 것을 배제할 수 없다"라며 운을 떼었다.

이어 유럽 리버럴 블럭의 핵심 지도자들인 독일의 메르켈, 프랑스의 마크롱, 영국의 메이 등이 스페인 중앙정부에 대한 전면적인 지지를 표명했다. 이 지지 표명이 중앙정부의 노골적인 탄압 속에 나왔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먼저, 독립투표를 앞두고 중앙정부는 카탈루냐 내 선거사무소를 급습해 투표용지를 회수하고, 관계자 14명을 체포한다. 총투표일에는 물리적 충돌을 야기하며 900여 명의 부상자를 양산했고(10월 1일), 독립파 핵심 지도자 두 명을 체포한 후(10월 17일), 10월 22일에는 카탈루냐 자치주의 해산을 본격 선언한다.

같은 기간 지역 자본가 집단의 움직임도 일사천리하게 진행되었다. 총투표가 진행된 10월 1일 이후 불과 3주 만에 1,300여 개 기업의 본부가 유로존 이탈을 우려해 카탈루냐 밖으로 떠나갔다. 독립투쟁의 여파로 카탈루냐 관광산업에서 20%의 손실이 발생했다는 언론보도가 연이어지도 했다. 독립운동 진영의 움직임은 상당히 격앙되면서도 위태롭게 전개되는 중이다. 중앙정부의 탄압과 자치정부 해산령에 맞서 연일 수십만의 거리시위가 전개되었다. 은행들의 조직적인 카탈루냐 이탈에 저항하기 위해 시위대는 집단적인 은행 인출운동을 진행했고, 참여자들은 155유로와 1714유로 등을 인출하면서 독립운동의 상징성을 부여하기도 했다. ('155'는 중앙정부가 카탈루냐 자치정부 해산령의 근거로 삼은 헌법 155조를, '1714'는 카탈루냐의 스페인 종속의 발단이 된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의 연도를 암시한다.)

전 세계 언론이 1978년 체제하에서의 '최악의 헌정적 위기'로 묘사하는 이 사태에서 유럽연합 지도자들의 태도가 갖는 함의는 무엇인가. 유럽연합 집행위는 이미 카탈루냐가 독립을 선포할 시 유럽연합에 재가입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절차를 밟아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사실상 자치주의 독립을 유로존 탈퇴로 해석할 것임을 시사한 바 있다. 이 공식적 입장발표는 유로존의 긴축정책에 기생하는 카탈루냐 내 자본의 연쇄 이탈을 명령하는 조직적인 수신호와 같은 것이었다. 카탈루냐 내에 이미 유로존 탈퇴에 따르는 경제위기의 공포감이 조성되었고, 이 공포감은 중앙정부의 노골적인 탄압과 시너지를 일으키며 카탈루냐를 고립시키고 있다. 

유럽의 북중부에서는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의 우익 포퓰리즘이, 남부에서는 스페인과 그리스 등의 신흥 좌파정치의 부상이 신자유주의 우파의 헤게모니를 위협하고 있다. 그렉시트 논란을 수반한 2015년 그리스 구제금융 사태에서부터 2016년의 브렉시트 논란에 이르기까지 유럽연합은 다시 분리주의 움직임의 거대한 원심력에 의해 총체적인 거버넌스 위기에 직면한 상태다. 따라서 유럽연합 지도부들의 카탈루냐 사태 대응은 이 원심력의 모든 기대감을 그 뿌리에서부터 근절하겠다는 강력한 단죄의 성격을 갖는다고 봐야 한다. 스페인 중앙정부의 노골적인 탄압은 사실상 중재의 노력을 하지 않는 유럽연합 지도부의 방관자적 비호 아래 진행되고 있다.  
(독일 총리 메크롱이 마크롱과 메이를 사이에 두고 대화를 나누고 있다. 메르켈은 좁게는 유로존의 헤게모니를, 넓게는 글로벌 자유주의의 헤게모니를 수호하는 '자유세계의 지도자'로 평가받고 있다.)

따라서 문제는 다음과 같다. 카탈루냐의 중앙정부로부터의 독립은 유럽연합으로 대변되는 신자유주의의 헤게모니로부터 독립적인 정치공동체를 창출할 수 있는가. '유로화'라는 단일통화 체제하에서는 자국만의 독자적인 통화정책을 펼 수 없다는 점(그러므로 경제위기의 자체 해법을 찾기 힘들다는 점), 유럽재정위기의 여파 속에 유럽연합이 강제하는 긴축정책을 피할 수 없다는 점은 유로존 잔류의 결과를 비관하게 한다. 문제는 반대의 경우, 즉 유로존 탈퇴 이후에도 과연 탈퇴국이 세계무역의 자장 안에서 유로존으로의 종속을 피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시리자 소속의 그리스 전 재무자관 야니스 바루파키스는 브렉시트 투표를 앞두고 다음과 같이 영국인들에게 공개서한을 보낸 바 있다. "제가 당신들이 유럽연합에 남기를 원하는 이유는 탈퇴 투표가 당신들을 '떠날 수 있게'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브렉시트는 유럽연합을 떠나가보다 더욱 끔찍해지고 가슴 아프며 ­ 그 자신에게나, 당신에게, 그리고 사실상은 지구의 나머지 지역에게 ­ 더 위험해져 있을 유럽에 당신을 종속시킬 것입니다."

카탈루냐는 유로존 헤게모니 위기의 두번째 시험대다 

신자유주의의 도입 초창기의 우파 헤게모니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발언이 마거릿 대처의 "대안은 없다"(There Is No Alternative)였다. 머릿글자만을 따서 티나(TINA)라고도 불리는 이 발언은 사회주의의 몰락 국면과 함께 자본주의의 대안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이 신자유주의의 지배하에 그 어떠한 유토피아적 열망도 뿌리내릴 자리가 없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대처의 이 발언은 소위 '자유 세계의 지도자'로 급부상한 독일 메르켈 총리에 의해 의미심장하게 반복되었다. 요컨대, 신자유주의 압도적 지배 속에서 다른 어떠한 대안도 존재하지 않는다. 

2015년 그렉시트 논란으로부터 강화되었고, 브렉시트를 통해 본격화한 유럽연합 내의 모든 분리주의 움직임들은 이 대안 없음의 압박 앞에 총체적으로 무릎을 꿇고 있다. 그리스의 시리자는 유로존 탈퇴를 감수한 국민 총투표 결과에도 궁극적으로 긴축정책을 받아들이며, 반(反)긴축정당으로서의 자기 입지 자체를 강하게 훼손당했다. 2015년 구제금융 합의 후 그리스의 상황이 여전히 회복세를 타지 못했다는 점, 시리자의 정치적 입지 자체가 자기모순에 빠졌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카탈루냐는 이제 그 두 번째 시험대에 올랐다. 이 두 번째 시험대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가에 유럽 좌파의 명운이 걸려 있다. 

재정위기의 국면에서 유럽은 난민과 이민의 이슈가 다른 대안적 담론을 압도하고 있다. 과거 사회운동의 핵심 거점이었던 공업단지와 그 조직화의 모델을 형성한 민주노조는 체제내화되면서 운동의 중심축으로서의 역량을 훼손당하고 있다. 이것이 오늘날 유럽 중도좌파 운동의 양날개 모델인 사회민주주의와 민주노조 운동의 동반 쇠퇴를 야기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서 카탈루냐 좌파들의 거점형 자치주의 운동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카탈루냐 좌파들은 카탈루냐 민족주의 문화에서 마을운동의 형태로 보존되어 온 이른바 '이웃협회운동'(moivement veïnal)의 네트워킹을 새로운 조직화 모델의 준거로 삼았다. 10월 1일 총투표를 앞두고 결성된 '총투표사수위원회'는 이웃협회 등의 과거 네트워킹 모델에 기반해 대중들을 조직하며 투표소를 밤새 사수했다. 카탈루냐의 '이웃' 네트워킹은 프랑코 독재하에서 카탈루냐어를 보존하고 국가를 대신해 공공 서비스를 자체 조직화한 풀뿌리 조직문화였다. 이 낡은 문화적 유대감은 자치형 사회주의 운동의 새로운 정치 이슈들 ­ 대안 에너지, 주거권과 노동권, 이주민 인권, 이른바 '사회적 연대경제' 등 ­ 을 만나며 오늘날 카탈루냐 사회운동의 부흥을 이끌고 있다.  

카탈루냐 내 활동가들에서부터 스페인 중앙정부가 현행 독립운동을 바라보는 데 있어서 일치하는 거의 유일한 지점은 거리의 투쟁이 결코 주정부 여당의 통제하에 있지 않다는 점이다. 스페인 군대 내에서 폭로된 한 문서는 다음과 같은 내부용 평가를 담고 있다. "우리는 카탈루냐 정부가 이 조직들을 그 순간 제어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 (…) 거리는 급진파들에 의해 장악되었다." 주류 자본가 블럭들은 대부분 독립에 반대하는 스탠스를 취하며 주정부의 독립운동을 규탄하고 있고, 신자유주의 긴축정책을 추진했던 양대정당들은 독립에 반대하며 모두 10% 안팎의 낮은 지지율을 보일 뿐이다. 역으로 신흥 좌파들의 영향력이 유의미한 확장을 일으킬 수 있는 조건들이다. 

앞서 말했듯, 포데모스와 엔 꼬무는 독립보다는 현행의 헌법체제를 수정해 연방제를 구축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 독립이 되었든 연방제가 되었든 핵심은 현행의 투쟁을, '유럽연합'이라는 이름을 통해 지탱되고 신자유주의 금융화라는 맥락에서 발효되는 '1978년 체제의 청산'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 글을 쓰는 10월 23일 현재, 주정부는 중앙정부의 자치주 해산 결정에 반발하며 위태로운 투쟁을 이어가고 있다. 지역 거점운동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는 카탈루냐 독립운동은 그 사회운동의 조직화 모델부터 운동이 수반하는 포괄적인 의제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유럽 및 한국사회의 좌파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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