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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이후의 사상-문학을 말한다는 것 내가 쓴 글 - 국내

(지난 3월 세월호 참사 2주기를 앞두고 '세월호 시대의 말'과 관련해 열린 세교연구소 토론회에서의 발표한 원고. 발표 후 거칠게 썼던 원고를 일부 수정-보완했다.)


세월호 이후의 사상-문학을 말한다는 것

고태경(refur1343@gmail.com)

1. ‘세월호 이후’를 사고한다는 것

- ‘참사’로서의 ‘세월호’ 앞에 한국사회 지식인들이 내놓은 해석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1) 세월호 참사는 시장근본주의가 만들어 낸 재앙적 결과다. 2) 참사 당시 우리가 본 것은 국가의 ‘부재’, 혹은 국가가 모든 공적 기능을 민간기업으로 용역화하는 기업형 국가의 등장이라는 현상이었다. 3) 참사 이후 진상규명과정에서 나타난 미디어와 정부, 그리고 일부 사회집단들의 반응은 이 사회에 공적 ‘책임성’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라는 의문을 갖게 했다.

- 이러한 해석들은 모두 어떤 ‘부재’ 혹은 ‘상실’에 대해 말한다. 그런데 우리가 잘 묻지 않는 것은 이 부재가 궁극적으로 ‘무엇’을 지시하는가이다.

- ‘무엇’의 부재인가라는 물음이 생각보다 복잡한 답변을 부른다는 것은, 이 참사를 또 다른 ‘공적’ 죽음들의 역사적 과정들과 비교했을 때 뚜렷해진다. 1960년 4월 김주열의 시신, 1970년 전태일의 분신, 1980년 광주학살, 1987년 박종철의 고문치사 사건은 모두 당대의 거대한 사회적 소용돌이를 불러왔다. 주지하다시피, 80년 광주학살의 책임자가 이후 대통령이 되고, 그 공범자가 다시 다음 권좌를 이어받았다고 해서 당대 사회운동이 시대를 냉소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세월호 이후와 이전 시대의 ‘공적’ 죽음을 가로지르는 가장 핵심적인 변별점은 이전의 죽음들이 시대의 ‘환멸’을 불러왔을지언정 어느 누구도 쉽게 시대를 냉소할 수 없었다는 점, 그 죽음들이 오히려 당대 정치공동체 구성원들에게 벗어날 수 없는 어떤 정치적 부채감/소명감을 불러왔다는 점이다.

- ‘국가의 직접적 폭력’이라는 화두로 논의를 좁힌다고 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백남기 농민에게 가해진 국가폭력에 충격을 받지만, 그것이 ‘우리’라고 부를 수 있는 정치공동체의 소명감을 부르고 있는지는 확언하지 못하고 있다. ‘헬조선’이라는 오늘날 한국사회의 냉소적 담론이 놓인 지형이 바로 ‘세월호 이후’라는 세계지형이다. 낭만적 수사를 버리되, 조급하지 않게 이 문제를 더 ‘직면’해 볼 필요가 있다.


2. 공동체(communus)에서 munus가 의미하는 것
 
- 세월호 참사 당시 국가기능의 마비를 ‘국가의 부재’로도 볼 수 있겠지만(이 부분은 뒤에서 다시 논하기로 한다), 그 이후에 일어난 정부와 미디어, 그리고 일부 사회집단들의 반응은 ‘기구’로서의 국가 이전에 우리가 어떤 정치‘공동체’의 붕괴에 직면해 있음을 느끼게 한다. 김홍중은 이를 ‘기구’로서의  국가가 아니라 정서적 소속체이자 공동체로서의 ‘나라’의 상실로 규정한다.(주1) ‘각자도생’, ‘기업사회’의 등장, ‘탈정치화’ 그리고 포괄적으로는 ‘신자유주의의 지배’라는 표현들이 수렴되는 곳 역시 이 공동체의 붕괴라는 현상이다.

- 그렇다면 이때의 공동체란 무엇인가? 어원을 살펴보자. 공동체(community)의 어원 communus는 ‘공통의’를 뜻하는 ‘cum-’과 ‘-munus’(혹은 munia)의 결합으로 구성되며, 여기서 munus는 근본적으로 구성원들을 묶어두는 어떤 과제, 부채감 혹은 그들에게 강제된 은총(gift, 선물)을 의미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공동체의 munus가 인간 개개인의 ‘밖에서부터’ 그들에게 주어진다는 것, 은총이 그러하듯 바깥으로부터 다가와 인간의 내면을 불가항력적으로 사로잡는 외적 힘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주2).
 
- 같은 맥락에서 베네딕트 앤더슨은 근대의 ‘네이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다. “‘자연적’인 모든 것에는 선택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네이션-성(nation-ness)은 피부색과 성별과 혈통에, 그리고 탄생한 시대에 긴밀하게 흡수된다. 이 모든 것들은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이다.”(주3) 이러한 해석을 하며 앤더슨이 설명하고자 한 것은 20세기의 민족해방투쟁에서 왜 수많은 이들이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던지려 했는가다. ‘어찌할 수 없는’ munus의 힘은 근대의 정치공동체를 가능케 하는 핵심요소로 기능한다.(주4) 전태일과 오월광주 이후 사회운동의 시대정신을 사로잡은 것 역시 개별 구성원들이 회피할 수 없었던 강한 ‘부채감(munus)’과 같은 것이었다.

- 공동체의 공적 죽음에는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 내면을 불가항력적으로 사로잡는 어떤 힘이 존재했다. 오늘날 정치사상의 문제는 우리에게 ‘공통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데 몰두한 반면(혹은 ‘공통적인 것을 구성하라’라고 선언하는 반면), 우리를 공통적이게 ‘강제’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잘 묻지 않는다는 점이 아닐까 한다.(주5) 사회운동가들은 ‘공감’과 ‘연대’를 호소한다. 문학평론가들은 세월호 이후 ‘타인의 고통을 감지하는 감수성’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물으며 죽은 자와의 연대 혹은 증언문학의 필요를 역설한다.(주6) 그러나 도대체 그 공감과 증언은 어떻게 가능한가? 지난 십여 년간 ‘촛불’들의 수많은 ‘공감’의 시간을 경험한 후 우리는 다시 세월호 참사 2년의 시간 앞에 와 있다. 그 십여 년의 촛불시위들이 공감의 따뜻한 공간을 형성하다가도 덧없이 휘발되어 갔듯, 혹시 우리는 세월호 이후 공감과 증언의 언어가 언제 다시 휘발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여 있는 것은 아닌가. 


3. 사상-문학은 어떻게 수신자를 찾아가는가

- 만약 공감과 증언의 시간이 덧없이 사라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존재한다면, 그 이유는 그 공감/증언의 메시지가 수신자 대중에게 충분히 가닿지 못하고 있다는, 혹은 그 메시지가 수신자 대중을 하나의 공동체로 결속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일반적 판단이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근대의 문학이 시대의 양심을 표방하고, 사상가로서의 인텔리겐차가 운동의 화두를 끌고 갈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그들이 시대의 정신을 대표해 대중을 향한 메시지의 전파자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오늘날에는 메시지의 어떤 혼란, 혹은 증발이 존재한다.

- 이 혼란/증발을 이해하기 위해 잠시 근대의 공론장이 형성되는 맥락을 그 시대적 이행과정 속에서 간략히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근대문학의 대표적 장르인 근대소설의 모체는 서간체문학이었고, 서간체문학은 다시 18세기 부르주아 지식인(교양 독자 포함)들의 서신교류 문화에 근거한다고 알려져 있다.(주7) 그렇다면 메시지 전달장치로서의 서신은 어떻게 근대문학으로서의 ‘픽션’을 낳을 수 있었는가?

- 주지하다시피, 편지는 발신자-수신자 간의 구체적 관계라는 맥락 속에서 쓰여진다. 내가 A라는 이에게 편지를 쓸 때 ‘지난번 거기에서 보자’라고 하면서 그 ‘거기’가 어디인지를 명기하지 않아도 된다면, 그것은 나와 A 간의 일정하게 합의되는 언어사용의 맥락이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연인 간의 편지는 타인이 알아들을 수 없는 수많은 암호와 은어로 가득하다. 편지는 수신자-발신자가 정확히 명기되어야 하고, 많은 경우 수신자-발신자의 내밀한 관계 속에서만 온전히 소통될 수 있는 내용을 포함하곤 한다(그러므로 그 관계를 벗어나는 순간 그것은 암호가 되기도 한다).

- 그렇다면 문학은 어떠한가? 근대문학의 수신자는 ‘독자’다. 월터 옹에 따르면, ‘독자’의 영어 표현인 reader에는 연극의 ‘청중’(audience)과는 달리 집합명사형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는 무대 앞에서 군집을 형성하며 배우와 교감하는 청중과는 달리 독자는 텍스트 저편에서 완전히 파편화된 채로 존재하기 때문이다.(주8) 작품의 저자는 하얀 종이 위에서 얼굴을 알 수 없는 독자에게 말을 걸어야 하지만, 그 말이 불가해한 암호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독자와의 관계맥락을 형성해 줄 텍스트 외적 연결고리(컨텍스트)를 발견해야 한다. 18세기의 서간교류에는 구체적인 송수신자 간 관계가 존재했고, 서간체문학은 독자로 하여금 송신자와의 동일시를 가능케 함으로써 이 문제를 돌파했다.(주9) 그렇다면, 그 이후에 ‘서간’의 형식을 취하지 않은 근대의 픽션(소설)은 어떻게 그 고리를 발견했을까? 지면의 한계가 있지만, 다소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토론자가 생각하는 두 가지의 계기를 제안해 보고자 한다.

- 하나는, 1830년대를 기점으로 해서 부각된 ‘사회문제’의 출현이었다. 19세기 중반 유럽의 자본주의를 휩쓴 화두 중 하나는 ‘사회적 문제’라고 명명된 빈곤과 장시간 노동의 문제였다. 프루동의 <빈곤의 철학>(1846년), 맑스의 <공산주의당 선언>(1848년)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1862년)은 이 시대의 화두에 응답한 대표적 사상-문학 작품들로 당대의 지적 담론들의 일정한 경향을 대변했다. 하우저는 이를 ‘1830년대 세대’의 출현이라고 규정하며 다음과 같이 부연한다. “사회생활의 여러 사실들이 인간의 의식 속으로 들이닥치며, 이제 그것을 제외하지 못하게 된다. 스탕달, 발자크, 플로베르, 디킨즈, 톨스토이 및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같은 19세기의 위대한 문학적 창조들은 설령 어떤 다른 범주에 편입될 수 있다 하더라도 사회소설인 것이다. ... 이러한 사회학적 인간 개념이야말로 1830년 세대의 작가들이 소설을 위해서 발견했던 것이며, 맑스 같은 사상가가 발자크의 작품에서 가장 흥미를 느꼈던 점이다.”(<문학과예술의 사회사> 4권)

- 요컨대, ‘사회문제’의 출현은 흩어진 채 존재하는 익명의 독자-저자들을 하나의 컨텍스트로 묶어주는 준거적 현실이 되었다. 1830년대 세대의 리얼리즘에서 '리얼'은 시장모델형 사회에 난입한 일종의 '죽음'(les miserables) 이미지와 깊게 연관된다(사회문제의 출현과 18~19세기 시장모델의 자연법/칙 간 관계에 대해서는 필자의 <세월호 이후의 정치적인 것의 세속화>를 참조).

-  다른 하나는 이러한 문제에 대한 응답 방법으로서 나타난 사상-문학의 ‘매니페스토’(manifesto) 운동을 들고 싶다. 그간 우리말로 ‘선언’으로 번역되어 온 이 단어는 프랑스 인권선언 및 미국독립선언 등에서 사용된 ‘declaration’과 다소 구별되는 것으로, 원의미상 ‘출현’ 혹은 ‘등장’의 의미를 갖는다고 봐야 한다. 데클러레이션은 구체제와의 단절을 선포하며 새로운 패러다임의 도래를 알리는 행위였지만, 동시에 그 패러다임에 일정한 실체를 부여하고 체계를 완성할 의미화와 해석의 작업들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 과정은 다시 긴 갈등과 다툼의 시간이 노정되어야 했다(피에르 로장발롱의 작업들을 참조할 수 있다).

- 반면, 매니페스토는 패러다임의 선언이 아니라 이미 선언된 패러다임에 대한 특정 세력의 출현 혹은 난입을 의미한다(“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제라르 뒤메닐과 자크 비데는 이렇게 말한다. “메타구조는 항상 선언된다. ... [반면] 사회주의는 자유주의의 핵심에 기입되어 있지만 원래 상품관계의 위선적 한계 속에 속박되어 있는 메타구조적 약속을 실현한다.”(<대안마르크스주의>) 여기서 메타구조란 프랑스혁명의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같은 시민사회의 근대적 인권 선언을 의미한다. 그리고 1830년대 이후 등장한 세력으로서의 사회주의는 이 패러다임에 대한 난입을 통해 체제의 방향성을 재정향하고자 한다.    

- 이러한 19세기적 현상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사상-문학이 하나의 세력으로 세계에 출현했다는 것은 달리 보면, 그 창작자들의 상당수가 스스로를 ‘작가’라는 어떤 보편 개념 이전에 사회적 균열에 개입하는 특수 ‘세력’으로 인지하고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사회문제’의 출현이라는 시대적 상황과 맞물리며 18세기 지적 담론의 유산인 코스모폴리탄적 ‘인류’(humanity) 개념을 인민, 네이션, 노동계급 등에 대한 정치적 상상으로 대체케 하는 과정이 되기도 한다. 근대문학은 특정 ‘세력’이자 운동으로 나타남으로써 근대의 정치공동체를 상상케 하는 장으로 기능했다.

- 한편, 오늘날 문학의 언어에서 특징적인 부분은 수많은 작가론과 작품론이 존재하지만 뚜렷한 사조론은 찾기 힘들다는 것, 문학의 여러 시대적 현상은 존재하지만 그것이 어떠한 의식적인 집단운동으로는 잘 전화되지 않는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한번도 마주한 적 없던 이들에게 픽션의 상상력에 기반해 공동의 세계를 상상할 수 있도록 했던 것이 근대의 문학적 장이었다. 세월호 참사라는 새로운 사회문제는 다시금 우리에게 이러한 상상의 장을 연출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4. ‘세월호 이후’는 장기지속되는 준-내전 상태이며 사상-문학은 선택을 강요받는다

- 오늘날 정치공동체의 거대한 훼손 혹은 상실은 이러한 사상-문학 언어에 일어난 위기와도 일맥 상통한다. 앞서 언급했듯, 정치공동체는 기본적으로 문학적 상상의 결과물이며 근대문학이 시대정신의 대변자가 될 수 있었던 것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 그렇다면 다시 세월호 이후의 구체적 상황으로 돌아와 보자. 우리가 ‘세월호 이후’의 시대를 말하기 위해, 혹은 세월호로 전면화된 정치공동체의 위기를 설명하기 위해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글의 서두에서 언급했듯 많은 이들이 세월호 사태로부터 국가의 부재 혹은 무능력에 주목했다. 이 ‘국가의 부재’라는 화두로부터 세월호 이후 전개되는 사회현실의 움직임을 이해해 보자. 토론자가 보기에 이 ‘국가의 부재’ 혹은 ‘국가의 허구성’이라는 진단들은 일정한 레토릭 ‘과잉’을 포함하고 있는데, 그렇게 볼 수 있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 첫째, 우리는 아직 참사 당시의 정부의 방관과 무대응이 이른바 ‘시장근본주의’에 의한 ‘국가 부재’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죽음을 의도적으로 방기한 국가의 ‘적극적’ 판단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지 못한다. 정상적으로 운항되던 배가 갑자기 180도 가까이 턴을 하게 된 이유도, 박근혜 대통령의 7시간 행적에 무엇이 이루어졌는지도 여전히 ‘진상규명’의 과제로 던져져 있을 뿐이다.

- 둘째,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참사 이후 보인 정부의 모습이다. 지식인들의 진단을 반박하듯 오늘날 국가는 노동개악에서 역사교과서 국정화 추진을 거쳐, 테러방지법 제정에 이르기까지 여느 때보다 ‘강력’하고 심지어는 ‘과잉’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까지 한다(이 원고를 쓰고 난 후 총선에서 기세가 일정하게 꺾이기는 했지만). ‘선제적 구조조정’의 기치는 노동시장의 분할이 단순히 ‘시장근본’주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정부의 적극적인 정책적 추진력을 바탕으로 한 것임을 확신케 해준다. 지난해 말에는 ‘민생 구하기 입법촉구 천만 서명 운동’에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서명을 하는 기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 전후(20세기) 국민국가는 기본적으로 ‘인민의 국민적 포섭’이라는 패러다임하에서 작동했다. 중심부의 사회적 국가(복지국가)와 (반)주변부의 발전국가는 모두 정치적 영토경계 내의 노동력을 ‘완전고용’의 이상 속에서 포섭하며 성장했다. 반면, 오늘날 중앙정부는 시민사회의 포섭주체가 아니라 시민사회 내부의 당파적 분열주체에 더 가까워 보인다. 때마침 우파 운동(?)조직 어버이연합과 청와대의 관계가 폭로되기도 했다.

- 요컨대, 국가는 ‘부재’하지 않으며, 단지 우리가 상상하던 정치공동체의 그 자리를 벗어나고 있을 뿐이다. 문제는 국가의 이러한 경로이동이 이른바 ‘독재자의 딸’이 보여주는 단순 ‘이탈’이 아니라는 점일 것이다. 80~90년대 남미와 동아시아 경제위기를 거쳐 2008년부터 세계 중심부에서 폭발하고 있는 금융위기는 신자유주의 국가블럭으로 하여금 (사회적 통합이 아니라) 국민국가 내부의 준-전시상태를 연출하도록 하며 네이션의 새로운 사회적 재편을 강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21세기형 새로운 전쟁술인 ‘테러에 대한 전쟁’의 화살이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국민들 내부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국정원의 권한 강화 속에서 목격한다. 지역 간의 대립(신공항 논란), 노동 내부의 대립(정규직-비정규직 등), 세대 간, 성별 간 혐오 정서의 확산은 ‘사회’를 어떤 정서적 균열의 움직임이 관통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종편의 뉴스보도는 당장 북한과 전쟁이라도 일어날 것 같은 상황을 연출하고, 살인사건 등의 자극적인 범죄행위들을 즉물적인 이미지들 속에서 반복 보도하며, 대중집회의 일부 폭력적 상황을 확대하여 장시간 테러리즘의 현상과 유비하는 등의 적극적 디스플레이 전략을 펼치고 있다. ‘세월호 이후’를 사고한다고 할 때,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러한 사회의 분열 현상(혹은준-전시상태)이다. 이곳에 과잉된 국가 모델이 기이한 형태로 접합하고 있다.

- 시선을 잠시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 등지로 돌려 보면, 전후 계급타협에 기반해 헤게모니를 취했던 중도파 정치세력들이 몰락하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리스 시리자와 스페인의 포데모스, 영국 노동당의 코빈, 미국의 샌더스의 부상은 프랑스의 극우 파시스트 마리 르펜의 부상,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베네수엘라의 반차비스타 전선의 성장과 함께 봐야만 온전히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현상들이 한 세기전의 혁명기와 비교했을 때 다른 점은 다른 세계에 대한 열망과 미래에 대한 강력한 비전이 폭발했던 20세기 초와 달리, 오늘날의 정치적 분열은 정치공동체를 가능케 했던 munus(이는 사회문제를 통해 나타난다) 그 자체가 어떤 실현가능한 정치공동체의 상상적 전망과도 결합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 미국의 한 여론조사에서 20~30대 청년들 다수가 절차적 제도로서의 ‘민주주의’ 속에서 사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답변한 것으로 드러났다.(주10) 그들은 권위적이고 강한 카리스마의 지도자를 선망한다고 했다. 이 말을 앞서 길게 서술했던 내용 속에서 조금 더 의미 있게 번역해 볼 필요가 있다. 대중들은 자신들을 수신자 공동체로 만들어 줄 강력한 메시지의 발신자를 필요로 한다. 코빈과 샌더스와 포데모스가 의미 있는 대안의 흐름에 기여할 수 있겠지만, 그 흐름을 온전한 cum + munus의 결합으로, 즉 정치적 상상의 결속체로 이끌어 줄 수 있는 것은 말(言)의 발신자인 사상-문학의 등장이다.

- 돌아보면, 한국에서 의문사의 진상규명이 이루어지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정권이 바뀌고, 진상규명에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이들이 권좌에서 내려오는 데까지 십여 년에서 수십 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세월호 참사에 정치적 생명이 걸린 이들이 권좌에 있는 한 당분간 ‘세월호 이후’의 시간은 계속될 것이고, 현 정권의 폭력적인 경로이동은 가속화될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 일련의 법개정을 통해 세월호 이후 국가는 준-내전의 상황을 연출하며 스스로를 특정 세력으로 세력화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 모두가 세월호’이며, ‘모두가 세월호처럼 침몰할 수 있다’는 말이 그 온전한 의미를 획득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러한 ‘세월호 이후’의 장기적 경로를 통해서다.

- 세월호 참사는 근대문학의 종언과 정치공동체의 궁극적 위기라는 메타적 세계지형 위에 던져진 거대한 참사였다. 이 참사가 무겁게 다가오는 것은 우리가 처한 현실의 무기력감 때문이겠지만, 그럼에도 희망을 놓을 수 없는 것은 인간의 ‘말’(言)이 갖는 가능성을 놓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닮은 사람들’(cum-)을 하나의 소명(munus)하에 결합시키는 것이 ‘말’에 주어진 책무다. 이미 정권이 국가라는 기구를 시민사회 내부의 분열적 ‘세력’으로 전면화했다고 할 때, 사상-문학이 이 갈등의 상황을 우회할 방법은 없다. 스스로를 세력화함으로써만 온전한 의미의 수신자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근대 사상-문학의 숙명이었다. 세월호 시대 문학의 과제는 장기지속되는 이 ‘세월호 이후’의 위기 속에서 그 숙명을 다시 한 번 반복하는 것이다.



* 미주

1) 김홍중, 「마음의 부서짐 - 세월호참사와 주권적 우울」, <사회와 이론> 26호, 2015, 149쪽.

2) Roberto Esposito, Terms of the Political, Fordham Uni. Press, 2013, p. 14.

3) Benedict Anderson, Imagined Communities, London: Verso, 2006

4) Esposito, op cit., p. 15.

5) 동시대의 철학자들이 입을 모아 ‘공통적인 것’(the common)의 구성을 말하고 안토니오 네그리 등을 비롯한 이른바 ‘자율주의’ 정치철학자들부터 레닌의 반복을 말하는 지젝까지 모두가 ‘공통적인 것’의 구성에 대해 말한다.

6) “문학이 그 연민의 수사학과 달라야 한다면, 그 말들과 문학이 달라야 한다면, 세월호 이후의 문학이 그 이전의 문학과 달라야 한다면, 혹은 다를 수밖에 없다면, 문학은 이제 무엇인가?” 이광호, 「남의 자의 침묵」, 『문학과 사회』(27/4) 2014, 321쪽.

7) Jurgen Habermas, The Structural Transformation of the Public Sphere, p. 50.

8) 월터 옹, <구술문화와 문자문화>, 문학과지성, 1995, 122쪽.

9) 초창기 서간체문학의 경우 작가들은 독자들의 감정이입을 위해 작품 속의 편지들을 창작물이 아니라 실제 편지인 것처럼 꾸미고 스스로를 창작자가 아니라 편집자나 번역자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윤수, 「프랑스 서한체 소설의 역사에 대한 일고」, <프랑스문화예술연구> 53호, 2015, 365쪽.

10) Roberto Foa, "Are Americans losing faith in democracy?", Vox Poliarchy, Dec. 18. 2015. (http://www.vox.com/polyarchy/2015/12/18/9360663/is-democracy-in-trouble) 참고로, 30년대생 미국인들 1/10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약 70% 이상이 민주주의 체제에서 산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봤던 반면, 80년대 이후 출생자들의 경우는 그 비율이 30%이하로 하락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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